고구려라는 이름은 중국 후한의 역사가 반고가 지은 한서'지리지'에 최초로 등장하며, 한사군 중 현도군에 속한 현인'고구려현'이라는 지명으로 나온다. 이는 한나라의 지명 조어법과는 사이하는, 본래 자신들의 마을 또는 지역을 부르던 고유어 지명이다. 현도군 고구려현은 본래 오녀산성과 국내성이 있는 압록강 지안시 일대에 있었으나 기원전 75년에 토착민의 강력히 저항으로 싱징에 이전하였으며, 1세기에 다시 무순으로 후퇴하였다. 이 과정은 나라로서의 고구려가 성립하는 과정이기도 했는데, 부여계 유민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졸본에 도읍을 세웠으며, 인접한 지역인 고구려현에서 따와 고구려라는 고유명사로 국호로 사용하게 되었다. 현도군의 고구려현쪽도 계속 이름은 남아있다가 서기 14년 고구려 유리명왕에게 흡수당했다. 그래서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고구려를 공격하여 복속하는 대목이 나온다.
고라는 씨를 가진 인물 혹은 세력이 고구려 지역의 성립에 연관이 있거나, 현지에 끼친 영향 등의 배겨잉 있을 가능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고구려 태조대왕대부터 고구려 왕가가 부여왕족의 해 씨가 아닌 고씨를 사용하게 된 유래 또한 폭정을 이유로 모본왕이 시해당한 후 즉위한 태조대왕이 고씨 성을 가진 고구려 지역 출신이었거나, 고구려의 고씨를 잇는다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현도군이 설치되기 이전의 고구려라는 지역의 연혁을 확인할 수 있는 사료는 존재하지 않고 있기에 확실한 판단이 불가능하다.
초기의 고구려는 작은 나라였다. 졸본의 성읍 국가였으며,4세기까지만 해도 한반도 북부와 남만주 일대의 유력세력에 불과했다. 하지만 미천왕, 소수림왕, 광개토대왕, 장수왕 등 연이은 명군들의 치세를 거치면서 한강 유역을 포함한 한반도 중북부과 요동, 만주를 아우르는 강력한 대국으로 성장했다.
전성기의 고구려는 백제를 정벌하여 멸망에 준하는 피해를 입히는 한편, 백제, 가야, 왜 연합군으로부터 신라를 구원하여 신라를 사실상 속국으로 삼았다. 북으로 동만주, 연해주 일대의 말갈 세력 대부분과 요서, 내몽골 일대의 거란 세력 일부를 복속시켜 고구려의 세력권에 편입시켰다. 요동을 차지만 후에는 중국 왕조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된다.
이 시기 고구려는 아시아 전역을 범위로 잡아도 그 존재감이 뚜렷할만큰 위상이 매우 높았고 세계로 시야를 넓혀도 상대 손가락 안에 넉넉히 들만큼 강대국으로 군림하였다. 명실상부 자타가 공인하는 한반도와 요동, 만주 지방의 지역 패권국이었다. 그러나 동아시아 최강국이었던 중국 통일 왕조들의 침략을 70여 년가량 막아내면서 국력은 지속적으로 소모되었고, 진흥왕 이후 급성장해 백제를 밀어내고 고구려 한반도 패권을 두고 경쟁하게 될 신라와의 외교에 실패함과 동시에 군사면에서도 신라 방면으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특히 660년의 백제 멸망과 663년 백제부흥운동의 좌종로 인해 양면전선의 불리함이 가중되었으며, 여기에 연개소문 사후 그 아들들의 분열이 겹치면서 정치적 소요 사태가 크게 발생했으며 결국 당나라, 신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